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란실바니아 공국 (문단 편집) ==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 1570년, 야노시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와 조약을 맺어 트란실바니아 [[프린스|공작]] 직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신 헝가리 왕위를 정식으로 양도했다. 그 결과 야노시는 '트란실바니아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 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고, 이로써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탄생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두 패권국 사이에서 정치, 외교적 술수를 발휘하며 2세기 동안 자치 공국으로 남았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가 허용되었지만 [[루마니아인]]이나 소수의 [[슬라브인]]은 [[농노]] 신분에 불과한 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헝가리인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고 [[정교회]]도 공인 받지 못하면서 신앙의 박해를 받는 등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605~1606년 동안 공국을 통치한 보치커이 이슈트반(Bocskai István) 치세에 문화, 예술적인 부흥을 맞이하였으며, 라코치 죄르지 1세(I. Rákóczi György) 때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의 왕위를 노렸던 라코치 죄르지 2세(II. Rákóczi György)는 오스만 제국의 허락 없이 [[스웨덴 제국|스웨덴]]과 연합해 [[폴란드-리투아니아|폴란드]]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이 전쟁에서 대패한데다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오라데아|너지바러드]] 등을 빼앗겼다. 이후 공작이 된 케메니 야노시(Kemény János)같은 경우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손을 잡았다가 오스만 제국에 찍혀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는 등 공국의 존립이 점차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퇴쾨이 임레]]의 상 헝가리 반란으로 촉발된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과 그에 뒤이은 [[대튀르크 전쟁]](1683~1699)에서 오스만 제국의 대패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확실히 강해지면서 이에 오스만 제국과 힘을 합쳐 맞섰지만 1687년에 [[황제군|합스부르크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계기로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691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 독립 공국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등이 모두 인정되었다. 하지만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튀르크 전쟁이 끝나고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바나트를 제외한 헝가리 전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인정되면서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하고 가톨릭 이외의 종교들은 박해받기 시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헝가리인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력군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빠져나간 틈을 타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는 헝가리 귀족들과 [[루마니아인]]·[[세르비아인]] 민병대의 활약으로 1711년에 서트마르(Szatmár) 조약이 체결되며 반란은 일단락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트란실바니아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를 계기로 트란실바니아 군주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파견한 총독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자치 공국으로서의 명운은 사실상 다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